〈상〉 도로위 달리는 시한폭탄
실형 선고는 100건 중 11건 그쳐
“재범 더 많아… 강력한 처벌 필요”
지난해 5월 25일 오전 11시 15분경 광주 동구의 한 도로를 달리던 1t 화물차가 횡단보도로 돌진했다. 이 차량은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던 시민과 보행자를 차례로 친 후에야 멈췄다. 한 피해자는 머리를 크게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사망했고, 다른 피해자는 다리 골절 등 전치 14주의 중상을 입었다. 운전자 A 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110%로 면허 취소 수준이었다.
사망한 피해자의 유족들은 합의를 거부하며 “엄벌을 내려 달라”고 법원에 요청했다. A 씨는 2019년 음주운전 사고 상해, 2020년 무면허 운전으로 각각 500만 원, 200만 원의 벌금형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그런데 A 씨는 올 2월 광주지법 항소심에서 1심과 같은 징역 4년이 확정됐다. 재판부는 “부상을 입은 피해자와 합의한 점, 전날 술을 마시고 숙취운전으로 보이는 점 등을 참작했다”고 했다.
1일 동아일보는 법원 판결 인터넷열람시스템을 통해 음주운전으로 사람이 다치거나 사망한 사건의 최근 확정 판결문 100건을 분석했다. 그 결과 100건 중 징역형 실형이 선고된 건 11건(11%)뿐인 것으로 나타났다.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사망하게 했는데도 90%가량이 집행유예(75건)나 벌금형(14건)을 받은 것이다.
100건 중 사망 사건은 4건이었는데 절반인 2건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으며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에도 최대 형량은 4년 6개월에 그쳤다. 재판부는 선고에서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다”, “피해자와 합의했다” 등의 이유를 들며 형을 감경해 줬다. 가해자 중 48명이 재범으로 초범(44명)보다 많았는데 이런 ‘솜방망이 처벌’의 결과로 해석된다.
지난달 8일 대전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에서 배승아 양(10)이 숨지는 등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자 대법원 양형위원회(위원장 김영란 전 대법관)는 지난달 24일 회의를 열고 음주운전 범죄에 대한 처벌 기준을 일부 강화하는 내용으로 교통범죄 양형기준을 변경했다.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도 1일 음주운전 전력이 있는 운전자 차량에 술을 마시면 차량 시동이 걸리지 않게 하는 ‘시동잠금장치’ 부착을 의무화하는 도로교통법 개정안을 대표발의하며 대책 마련에 착수했다.
하지만 1일에도 전북 완주군에서 20대 음주운전자가 몰던 승용차가 길을 걷던 40대 부부를 들이받아 남편이 크게 다치고 부인이 숨지는 등 음주운전 사건 사고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다. 운전자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08% 이상으로 면허취소 수준이었다.
정형근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음주운전은 참혹한 피해를 줄 수 있는 만큼 강력한 처벌이 필요하다”며 “재판부가 바뀐 양형기준을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필요하면 양형기준을 더 강화해서라도 음주운전을 근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음주운전 사망상해 재범중 17%만 실형… “반성” 등 이유로 감경
만취운전으로 사망사고 내도
4명중 2명이 집행유예 받아
“솜방망이 처벌이 재범률 높여
정상참작 제한-양형기준 강화를”
“늦게나마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어….”
“20대 초반 사회 초년생인 점을 고려해….”
1일 동아일보가 확인한 음주운전 상해·사망 사건 확정 판결문 100건에는 이 같은 표현이 단골로 등장한다. 운전자들의 각종 사정을 참작해 재판부가 내린 선고는 100건 중 89건이 집행유예 또는 벌금형이었다.
2018년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왔다가 만취 운전자에 의해 세상을 떠난 윤창호 씨 사건 등을 겪으며 한국의 음주운전 사고 시 처벌 기준은 최대 무기징역으로 강화됐다. 하지만 최근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여전히 법정에서 ‘온정주의’가 작동한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 재범 48명 중 8명만 실형
솜방망이 처벌의 근거로 가장 많이 거론된 것은 “범행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다”는 표현으로 판결문 100건 중 78건에 등장했다. 그 밖에도 △피해자와 합의했거나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음 △보험으로 피해 일부가 회복됨 △피해자의 상해가 중하지 않음 △초범이거나 동종 전과가 없음 등의 이유로 처벌 수위가 내려갔다. 최근에 결혼을 했다거나 운전자도 상해를 입었다는 등의 사유가 참작되기도 했다.
처벌 수위가 낮다 보니 음주운전이 반복되는 경향도 나타났다. 판결문에 등장하는 가해자 중 초·재범 여부가 확인되는 92명 가운데는 재범자가 48명으로 초범(44명)보다 많았다. 하지만 재범자 중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는 8명(16.7%)에 불과했다. 심지어 재범자 1명은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음주운전 전과가 4번 있고, 무면허로 운전해 사고를 낸 가해자는 1심에서 징역 2년이 선고됐지만 항소심에서 징역 1년 6개월로 감형됐다. 경찰청에 따르면 음주운전 재범률은 2019년 43.8%에서 2021년 44.8%로 늘었다.
판결문에 나타난 음주운전자들의 평균 혈중알코올농도가 0.167%로 면허취소(0.08%) 기준을 훌쩍 넘는 만취 상태였다. 이들이 사고를 내기까지 운전한 거리는 평균 5.98km에 달했다.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마포구 합정역까지의 거리를 만취 상태로 달리다가 사고를 낸 것이다.
● 사망사고 4건 중 2건은 집행유예
피해자가 사망한 사고 4건 중 절반인 2건에 대해서도 집행유예가 선고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6월 16일 오후 전북 남원시의 한 도로에서 혈중알코올농도 0.188%의 만취 상태로 화물차를 몰다가 사망사고를 낸 운전자는 올해 1월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확정됐다. 재판부는 “범행을 시인하고 반성하고 있다고 보이는 점, 유족들과 합의한 점, 과거 범죄 경력이 없다는 점 등을 참작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3월 광주 동구에서 만취 상태로 시속 50km 제한속도 구간을 시속 101km로 달리다가 사망 사고를 낸 운전자 역시 비슷한 이유로 올해 1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나머지 2건은 실형이 선고됐지만 형량은 4년과 4년 6개월에 불과했다. 수도권의 한 고등법원 판사는 “고의적 살인과 음주운전 사망사고를 완전히 같은 수준으로 볼 순 없겠지만 앞으로 유리한 정상으로 참작할 수 있는 사유를 제한할 필요는 있어 보인다”고 했다.
● 대낮 음주 단속 3차례, 167건 적발
지난달 8일 배승아 양(10)의 사망 사고 이후 경찰이 예고까지 하고 특별단속에 나섰음에도 음주운전은 끊이지 않고 있다. 경찰청은 지난달 14일 오후 1∼3시, 20일과 27일에는 오후 2∼4
시 스쿨존 위주로 음주단속을 실시했는데 낮 시간임에도 매번 50건 이상 적발됐다. 총 적발건수는 167건이다. 판결문에서도 오전 6시∼오후 6시 일과 시간에 음주운전 사고를 낸 경우가 28건에 달했다.
지난달 24일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도로교통법상 음주운전에 대한 양형기준을 신설해 혈중알코올농도 0.2% 이상 음주운전자에게 최대 징역 2년 6개월에서 4년까지 선고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음주운전으로 인한 상해, 사망에는 각각 기본 형량으로 징역 10개월∼2년 6개월, 징역 2∼5년을 권고하고 있어 추가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최승필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회에서 상습 음주운전을 하는 운전자에 대해서만이라도 처벌 하한선을 실형으로 하는 법안을 만드는 등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고 했다.
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
장하얀 기자 jwhite@donga.com
완주=박영민 기자 minpress@donga.com
유채연 기자 ycy@donga.com